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포츠담 회담 (문단 편집) === [[냉전]]의 시작 === 이미 5개월 전이었던 2월에 열린 [[얄타 회담]]에서부터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던 [[냉전]]은 포츠담 회담을 통하여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발칸반도를 비롯한 동부 유럽 곳곳에 소련은 자신의 위성국가들을 세웠고, 특히나 자유 선거를 실시하기로 했던 얄타 회담에서의 약속을 뒤집어버리고 스탈린이 폴란드에 공산당 통치 체제를 세운 사실은 서방측의 불신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게다가 전반적으로 스탈린에게 우호적[* 덕분에 냉전 기간 내내 루스벨트는 정계, 학계를 가리지 않고 스탈린의 야망을 과소평가해서 냉전을 불러일으켰다고 가열차게 비난당했다. 루스벨트는 워싱턴, 링컨 다음으로 존경받는 미국 대통령이면서도 여전히 그를 저평가하는 사람들은 그의 대소 유화책이 냉전이라는 파멸적인 양상을 불러왔다고 이야기할 정도이다. 한반도 얘기로 넘어오면 결과론적인 시각이지만 원폭의 개발로 구태여 필요없었을 소련의 대일 참전을 쓸데없이 종용한 측면이 있다. 물론 원폭 개발은 7월이었기 때문에 어디까지나 결과론이지만 어쨌든 정치인은 결과로 평가받으니 말이다. 어찌되었든 미국 학계에서는 세계대전 수행에 루스벨트가 큰 공헌을 했음을 부정하진 않으면서도 그의 대소 유화책은 재앙이었으며 그가 시의적절하게(?) 죽었다고 평가한다.]이었던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1945년 4월 뇌출혈로 사망한 이후 [[해리 트루먼]]이 대통령직을 승계한 것[* 해리 트루먼은 전반적으로 반공적인 성향이 1944년 대선의 러닝메이트였던 루스벨트보다 훨씬 강했으며, 소련의 공격적인 팽창주의 대외 정책에 철저히 비타협적인 태도로 일관했다. 포츠담 회담 이후의 일이지만 [[트루먼 독트린]]이 가장 좋은 예이다. 사실 트루먼은 독소전 초기에도 미국은 독소 그 어느 편을 들어서도 안된다고 주장했을 정도로 소련을 추축국과 같은 악의 축으로 여겼는데 결국 이러한 트루먼의 판단은 선견지명이었던 셈.] 역시 서방과 소련 사이의 대립을 더욱 심화시켰다. 이는 영국도 별반 다르지 않았는데 [[윈스턴 처칠|처칠]]은 원래 철저한 반공주의자로 유명한 인물이었으니 당연히 소련을 견제하는데 힘을 쏟았고, 처칠의 후계자였던 [[클레멘트 애틀리]]는 [[노동당(영국)|노동당]] 출신임에도 스탈린을 '악의 화신'으로 여기며 소련의 팽창을 막으려고 시도했다.[* 다만 애틀리 정권하의 영국이 소련에 제트엔진을 제공하는 등의 일이 벌어지긴 했다. 여기서 영국이 제공한 제트엔진을 복제한 엔진을 사용한 전투기가 [[MiG-15]]이고 이 기체는 한국전쟁 중 UN군에게 매우 성가신 존재가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